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쇼군|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 개입 === ‘분지’라는 새로운 연호나 도다이지 대불 개안에는 전란 대신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지만, 10월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유키이에의 요리토모에 대한 모반이 폭로되었다(《교쿠요》 10월 13일조). 고시라카와인은 요시츠네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요시츠네는 거듭 요리토모 추토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려줄 것을 요구했고, 오이고몬 쓰네무네도 이에 찬조하여(《교쿠요》 10월 19일조) 요리토모 추토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선지에 응해서 모여드는 무사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11월 3일에 요시츠네는 쫓기듯이 교토를 떠났다(《교쿠요》 동일조). 그 뒤 간토에서 무사들이 상경해 >“2품(요리토모)의 분노하신 모습” 를 전했고,(《아즈마카가미》 11월 5일조) 후지와라노 노리스에(藤原範季)가 >“법황의 주변이 몹시 불길하다”(《교쿠요》 11월 14일조) 라고 말하는 등, 인의 주변에서는 요리토모의 보복에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고시라카와인이 요리토모에게 >“유키이에와 요시쓰네의 모반은 천마(天魔)의 짓” 이라며 변명했지만, 요리토모는 >“일본국 제일의 대텐구(大天狗)는 또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려 하겠지요” 라며 혹독하게 규탄했다(《아즈마카가미》 11월 15일조, 《교쿠요》 26일조). 요리토모에게 있어서 요시츠네의 협박으로 내려진 추토 선지는 여전히 주효했고, 요시츠네 · 유키이에를 각각 9개 쿠니와 시코쿠의 지토에 보임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아즈마카가미》 12월 6일조, 《교쿠요》 27일조). 11월 24일에 [[타이라 가문|간무 헤이시]] 출신으로, 요리토모의 장인이었던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가 1,000기의 무사를 거느리고 입경했다. 28일에는 '''슈고(守護, 수호)와 지토(地頭, 지두)의 설치를 주청'''했고(《아즈마카가미》, 《교쿠요》 동일조), 12월 6일에는 ‘천하의 초창'(草創)으로서 가네자네가 나이란(内覧, 내람)으로 임명되었으며, 의주공경(議奏公卿) 10명에 의한 조정 운영, 타이라노 지카무네(平親宗)·다카시나노 야스쓰네·타이라노 나리타다·난바 요리쓰네(難波頼経)·하무로 미쓰마사(葉室光雅)·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成)·후지와라노 노부모리(藤原信盛) 등 14명의 ‘유키이에와 요시츠네에 동조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흉신'(凶臣)에 대한 해임을 골자로 하는 '''<묘당 개혁(廟堂 改革) 요구안>'''이 제시되었다(《아즈마카가미》 12월 6일조, 《교쿠요》 27일조). 다만 타이라노 키요모리나 키소 요시나카가 40명이나 되는 인의 근신을 해임하고 또는 추방시킨 것, 인세이 정지나 유폐를 단행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원만한 조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